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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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부산물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않고 탁하게 마시는 술

동동주, 청주와의 차이[편집]

  • 누룩을 발효시킨 후 윗부분을 바로 뜨면 동동주
  • 부산물을 충분히 가라앉힌 후에 맑은 부분을 뜨면 청주
  • 동동주, 청주를 떠낸 이후 남은 부분이 막걸리
    • 동동주나 청주를 떠내지 않고 그냥 통째로 막걸리로 만들기도 한다.

역사[편집]

삼국사기에 미온주(美溫酒)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고려 중기, 한 송나라 사절이 고려를 찾았다 남긴 견문록 '고려도경'에서도 "왕이나 귀족들은 멥쌀로 만든 청주를 마시는 반면, 백성들은 맛이 짙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막걸리는 오랜 기간 대중들이 즐겨 찾던 술이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분위기는 유지돼 왔다. 2017년 발표된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1966년 막걸리 출고량은 전체 주류의 73.69%에 이르는 등 그해 가장 인기 있는 술로 꼽혔다. 현재 '국민 술'로 꼽히는 소주나 맥주의 시장 점유율은, 당시만 해도 각각 13.97%와 5.92%에 불과했다.

국민 술, 막걸리의 쇠퇴[편집]

주세법[편집]

일제가 조선인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주세법을 도입한 게 막걸리 쇠퇴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국시대부터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만들어먹는 막걸리에 나라가 세금을 부과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제 간섭을 받던 1909년에 주세법,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6년에 주세령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으로 전통주 제조에 대한 통제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먹기 위해서든 아니면 판매를 위해서든, 나라로부터 제조 면허를 받은 사람만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나온 '주세령'을 통해, 집에서 만들어먹는 술과 판매용 술을 구분했고 사먹을 때보다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 나라에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로 인해 1918년 약 36만에 이르던 '자가 면허자'는 1920년 말 거의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주조업자의 통폐합도 이뤄졌다. 1916년 약 9만 명이던 주조업자는 1930년까지 4,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막걸리의 다양성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양곡관리법[편집]

박정희 정부 시절, 탁주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정부가 1965년 '양곡관리법'을 통해 순곡주 제조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나라에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쌀로 막걸리를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에 막걸리 제조업자들은 쌀 대신 수입 밀가루를 주원료로 사용했다.

밀 막걸리는 우리나라의 누룩과 맞지 않았고, 결국 막걸리의 품질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생산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막걸리를 향한 대중들의 수요는 많았고, 몇몇 제조업자들은 막걸리를 빨리 발효시키기 위해 공업용 화학물질 '카바이드'를 막걸리에 섞기도 했다.

제대로 숙성되지 않은 밀 막걸리와 카바이드 막걸리는 숙취를 유발했고, 결국 대중들 사이에서 막걸리는 '뒤끝이 좋지 않은 술'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그 사이 사람들은 소주와 맥주로 주종을 바꿨고, 결국 1988년에는 주류 시장에서 막걸리의 점유율은 29.92%까지 떨어져 39.67%를 기록한 맥주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됐다.

같이 보기[편집]